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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Diary 2009/11/09 15:29드러눕기 신공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가 다시 따뜻해졌다. 더 추워지기 전에 벨라 산책을 시켜줘야 할 것 같아서, 퇴근하자마자 벨라 가방을 열어서 겨울옷을 찾았다. 옥색 토끼옷을 입히고 싶은 마음에 분홍색 패딩옷을 찾고도 한참 가방을 뒤지고 있는데, 내가 겨울옷을 가방에서 꺼내자마자 산책갈 거라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놈이 작은언니 배를 걷어차고 뛰어오는 바람에 놈의 재촉에 시달리다 못해 그냥 패딩옷을 입히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러고 나와봤더니 패딩옷 입히기엔 날씨가 좀 덥더라. (...) 벗길까 말까 고민하다 고양이도 신종플루 걸린다는데 개도 건강조심해야지, 하고 감기대비용으로 입히고 파삭파삭 일부러 낙엽깔린 길을 소리내어 밟으며 나름 가을밤길을 즐기고 있었다. 찌르르 풀벌레소리 좋고, 사람도 없고 조명도 좋고 풍류가 있구나, 느긋하게 부채를 흔들어가며 길을 걷고 있으나 주인과 개의 마음이 각기 달랐으니 벨라는 구역 확인 및 사회활동 중이셨던 거다.
오늘 내 구역에 새로 등장한 잡놈은 없는가, 내 영토는 오늘도 무사안전한가? 나보다 덩치가 클만한 냄새는 없는가? 열심히 코를 처박고 킁킁대며 구역 순찰 및 도장 남기기에 여념이 없던 벨라는, 느긋느긋 양반걸음으로 걷는 주인이 몹시 방해가 되었고, 좀 더 면밀한 냄새 탐구가 필요한 구역임에도 불구하고 얼른 가자며 보채는 주인이 몹시 원망스러웠다. 저 작자는 지금 내가 구역 순찰중인 것을 보고도 모르는가? 눈구멍은 뚫려있으되 눈알은 빠져있는가! 벤치 아래며 큰 나무 밑마다 심도있는 관찰 및 수집을 해야하건만 이 냄새가 옆집 요크셔테리어인지 아랫집 진돌이인지 구분안가 내 구역에서 꺼지라는 협박을 남겨야 할 지 친하게 지내자는 편지를 남겨야 할 지 종잡을 수 없는 이 판국에 지금 내 목줄을 죽어라 잡아당기면 어떡하잔 말인가!?
놈은 힘싸움에 못이겨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며 애틋한 눈으로 벤치 밑을 쳐다보고 또 짜증나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곤 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싱글싱글 웃으며 '산책 나오니까 좋지?' 하고 애한테 말을 걸고 있었고 말이다. 그러다 또 한번 모퉁이가 나오고 벤치가 있으며 강아지들이 영역 표시를 하는 그 장소가 나타났을 때, 나는 문득 줄이 유난히 겁나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벨라가 또 뻗디디며 서있나 싶어 계속 끌고 걸으면서 뒤를 돌아봤다가 그 자리에서 꼬꾸라질 뻔 했다.
벨라가 얼마나 그 자리에 멈춰서고 싶었는지 벌러덩 드러누워선 고개만 벤치쪽으로 돌리고 그대로 질질 끌려오고 있었던 거다. (...) 패딩점퍼는 질질 끌려서 흙먼지 다 묻었지, 내가 헉! 하고 놀라서 다가가자마자 벨라는 벌떡 일어나서 벤치 아래 클로버에 얼굴을 아예 갖다 파묻고 냄새 맡기에 여념이 없지, 뒤에서 따라오던 운동 중인 아줌마들은 '어떻게 개가 넘어진 것도 모르고 끌고 가냐'며 웃지.. 하아, 그 뒤로는 벨라가 멈춰서고 싶다 그럼 군말없이 멈.... 춰 주진 않았다. 벨라한테 질 순 없으니까. 난 너보다 우위에 있다, 이 말이심. 너한테 져줄 순 없으심. 하아, 이러니까 뭐 안사준다고 마트 바닥에 드러눕는 미운 일곱살과 못사준다고 버리고 가는 엄마의 포스가 내게서 느껴져. 그치만 그것이 사실이긴 하지. 그건 못 사준다 vs 이대론 못 간다.
여튼 그래서 종국엔 길바닥에 드러누워 이대론 못간다고 시위를 하는 벨라를 안아 집으로 돌아와 작은언니한테 조잘조잘 보고했더니, 넌 왜 벨라님의 사회활동을 방해해서 명망을 실추시키느냐 비난을 듣고 말이다. (...) 내가 다신 널 데리고 산책 갈 줄 아느냐 차갑게 쏘아붙여봣지만, 놈은 그냥 말없이 치석제거용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벨라와 나는 요즘 이렇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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